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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쁜소식부산 | 2011.10.14 11:16 | 조회 12519

    그래, 진즉에 갈 일이었어!

     



     

     

    잘살았고, 잘난 줄 알았다. 구원받았다고 교회에 빠져사는 동생이 바보 같아서 동생을 교회에서 건져내려고 햇따. 하지만 내가 가진 행복은 물거품 같은 것이었고, 동생이 가진 행복은 영원한 것이었다. 소중한 것들을 하나 둘 잃고서야 나는 내 길에서 돌이켰다.

     

     

     

    | 내 동생 김종필

     

    "자, 50만원. 이 돈은 내가 주는 거야, 하나님이 주는 거야?"

    '그야 하나님께서 주신 거죠."

      내 동생 김종필 형제는 그랬다. 당당했고, 그리고 길게 말하지 않는다. 핵심만 아주 간단히. 군더더기를 붙이는 일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되도록 말을 아낀다. 임신한 아내(내겐 올케)가 입덧이 심해도 그닥 심각해 하지 않았고,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에도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냥 교회에 열심인 모습이 날 아주 질리게 했다. 내 입장에서는 시부모 모시고 사느라 고생 많은 올케를 볼 낯이 서지 않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3대 독자 아드님을 불공으로 얻으신 할머니의 며느리인 우리 어머니 역시 장롱 위에 작은 독 하나를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며 아들의 무병장수와 입신양명을 지극정성으로 빌며 사셨는데, 아들이 느닷없이 출세하고는 담을 쌓고 교회를 제집 드나들 듯하니 늘 앓고 누워 계시기 일쑤였다.

     

      하루는 도저히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어서 남편에게 “종필이가 저러다 폐인이 될 듯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어?” 하고 얘기 했다. 다혈질의 남편, “교회를 확 불질러버리지, 뭐. 그리고 보상해 주든지, 아니면 감옥 생활 좀 하든지 하면 안 되겠나!” 단단히 미친 생각인데도, 그게 가장 적절한 묘안처럼 보였다. 하다 못해 엄포용으로라도 한번은 저지르고 봐야겠다는 강한 유혹에, 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올케에게 “교회에 가서 아주 본때를 보여주자.”하고 다혈질인 한 사람을 더 불렀다. 막내는 매형의 그런 제안에 한 술 더 떳다. 아예 석유통을 들고 온 것이다. 네 사람은 위풍당당하게 부산소망교회로 향했다. 지금은 교회가 합해져 없어졌지만, 당시 사직동 국민시장 입구에 조그마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사역자였던 최정환 전도사님은 무섭도록 차분했다.

     

      “형제님이 교회에 오는 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고 형제님 스스로 자기 영혼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서 오는 것이니 내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교회에 불을 지르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만한 분들인 것 같은데, 냉정을 좀 찾으셔야겠습니다.”

     

      우리는 번갈아가며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다 돌아왔다. 전도사님 이야기가 맞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제 발로 걸어온 사람을 전도사님이라고 막을 수 있겠는가? 동생 김종필이 자기 의지로 가지 않아아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 어디 하는 데까지 해보자!

     

      동생을 두고 집안은 또 한 번 의견이 분분했다. 멀리 보내버리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 외딴 절에 박아두고 공부를 시키자는 의견, 내가 가구장사를 하니까 데리고 있으면서 부려먹기도 하고 감시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애기까지. 결국 가족 모두의 협박과 회유에 의해 동생은 내 감시 아래 있게 되었고, 그날로 지독한 밥벌이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 건물에서 하는 장사라 나는 본전만 되어도 팔아내기 시작했고, 가구 장사는 지치도록 잘되었다. 가구가 잘 팔리는 ‘손 없는 날(보통 음력9,10일)’에는 동생을 새벽부터 나오라고 해서 밤 12시가 되도록 정신없이 가구 납품을 시켰다. 시간만 남으면 창고정리, 매장 전시, 본사 물건 받기 등 다리가 휘청거리도록 일을 부려먹었다. 하지만 지쳐서 교회에 못가리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교회가 코앞이라 더 열심히 나갔고, 기도는 더욱 간절했다. 안쓰럽다는 마음은 괘씸한 마음에 눌려 ‘어디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오기가 뻗쳐 동생에 대한 식구들의 핍박은 갈수록 그 도가 심해졌다.

     

      그러나 결국 어머님이 손을 드셨다. 아들 죽이겠다는 마음에, 더 이상 그 방법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약해빠진 동생을 그 방법으로 부려먹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죄책감에 교회에 헌금할 일이 필요하면 한번씩 주었는데, 건넬 때마다 내가 주는 게 아니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뒤에다 한마디만 더 붙이면 좀 좋으랴. 누나가 주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거라며 ‘어쨌든 고맙다’고 하면.

     

     



     

     

    | 비 철철 오는 날 이사를 했다

     

      나는 잘살았다. 날마다 먹을 것 궁리하고 입을 것과 탈것에 욕심을 있는 대로 부렸으며,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항상 단정지었다. 1998년, 결혼한지 만 9년, 내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IMF는 나도 비켜갈 수 없는 한계상황이었다. 허우대만 멀쩡했지 실상 내 살림이라는 것도 사상누각이었다. 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집과 땅을 담보로 나름 사업이라는 것을 벌였고, 하필 IMF와 맞물려 2년도 못되어 사업은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흐생을 위한 피나는 노력은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쏟아붓고 나서야 손을 들고 말았으니, 나도 별수 없는 미련퉁이였다.

     

      전세 2천만 원에 월세 10만원. 비 철철 오는 날 이사를 했다. 콩만한 방에 콩만한 거실, 냉장고 하나 둘 데 없는 공간에 서서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아니, 실실 웃어댔던 것도 같다. 사흘 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하루는 딸이 물었다.

    “엄마, 집이 왜 이렇게 작아?”

    “응, 엄만 큰 집이 너무 힘들었거든. 그리고 너희랑 함께 잘 수 있으니까 엄마 너무 좋은데, 딸은 안 그런가 보네? 우리 이제 꼬꼬마텔레토비도 함께 보는 거야!”

     

      딸은 나름 기뻐했고, 나는 끝까지 씩씩해져야 한다고 내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남편은 적당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수습은 언제나 남겨진 사람의 몫이었고, 나는 빚진 자로서 체면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야 했다. 다시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아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다. 학원 강사와 개인 과외로 밤 12시를 넘겨서 집에 돌아와야 하는 생활이 5년 동안 이어졌다.

     

      동생이 찾아왔다. 힘겨운 누나를 위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누나의 삶을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것과 이제 더 이상 버티고 섰지 말라는 고약한 말만 늘어놓고 갔다. “그런 소리 할 양이면 오지마라, 둘째야. 지금 내가, 정말 지금 당장 내가 팔다리를 씩씩하게 휘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너는 아냐?”하고 쏘아붙였다. 동생은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

     

      그런데 동생이 가고 난 뒤 이상하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도 날 마음을 다해 찾아 주지 않는 이 형편없는 공간에 찾아와 진정으로 누이를 걱정해 주는 동생이 너무도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말로 받은 위안은 하나도 없었는데, 그 마음이 너무도 고맙게 느껴지는 것에 나도 모르게 교회를 한번 따라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교회를 불질러버릴 거라고 덤벼들어 놓고 무슨 낯으로 교회에 갈 수 있으며, 선뜻 ‘너하고 함께 교회에 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하나님, 제 딸아이를…!

     

      아들 녀석 손을 잡고 딸과 메가마트에 가자고 약속한 날이었다. 대문을 나서 10미터쯤 걸었을 까, 갑자기 뒤에서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았다. 딸이 어깨 높이 난간에서 떨어져 사정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따라오다가 무엇에 씌었는지, 그 좁은 담벼락을 기어올라가 난간을 따라 까불거리며 걸어오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딸은 숨쉬기가 힘든지 연신 꺽꺽거리며 힘겨워했다. 입술이 새파래지더니, 눈동자까지 희멀건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온몸으로 스미는 두려움에 나조차도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랐다. 들쳐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말까지 더듬거리며 혼이 나간 내 모습에 아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나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제발! 제발! 하나님, 제 딸아이를...!’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해주십사고 나도 모르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한 말 가운데 확실한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나중에 심각한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고만 얘기할 뿐, 무슨 검사 무슨 검사를 받아 보자고 했다. 딸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정밀검사에 하루를 다 보내고 나서야 병실로 옮겨졌다. 나는 딸의 증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을 딸의 얼굴에 박고 있었다.

     

      한 번도 기도해 보지 않았어도 입에서 기도가 술술 흘러나왔다. 일단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퇴원절차를 밟자고 해서 나는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이틀 동안 나는 허깨비처럼 몽롱하게 지냈고, 결국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에 이르렀다. 동생의 표정을 담담했다. 누나가 교회에 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교회 바닥에 날 앉혀 놓고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전사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라고 할 뿐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나와 별 상관은 없었다. 나는 나대로 내 처한 상황에 맞게 기도할 뿐이었다. 기도 때문이었을까, 딸은 검사 결과 별 이상 징후가 없다고 했다.

     

      나는 여전히 사는 일에 목을 매고 있었다. 수양회를 따라갔다. 반은 억지로, 반은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적 약속이행으로. 그런데 수양회 기간 내내 나는 불만스러웠다. 5년 동안 청승스런 삶이 지겹도록 몸에 밴 내가 수양회에서도 청승스럽게 주저앉아서 밥을 퍼먹고 있다는 것이 싫었고, 불편을 꾸역꾸역 감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제자매들의 친절조차 싫었다.

     

     

     

    | 그래, 더 살지 말자

     

      6년 동안 날 힘겹게 했던 그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k 이상하게도 살림이 잘 불어 주었다. 다시 내 욕망은 끝없이 치닫기 시작했고, 내 삶의 패턴도 원래대로 회복되는 듯했다. 동생이 찾아왔다. 누나는 오만하고 악하다고 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최후를 생각하라고 했다. 그렇게 한마디 하고 돌아갔다.

     

      안정을 찾았을 때 남편은 슬그머니 합류했다. 힘겨울 때 함께해주지 않았던 남편에 대한 미운 감정은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다. 한동안 치열하게 다투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독설 또한 아끼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미운 생각이 들었을까. 타인조차도 그렇게 미워해 본적이 없는데, 하물며 아이들의 아비고 내 남편인데도 내 감정의 격류를 도저히 다스릴 수 없었다.

     

      사는 일이 갑자기 시들해져버렸다. 남편과 자식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그래봐야 먹고 입는 일, 그러다 차별없이 모두 재가 되어야 한다는 건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못 견디게 억울한 일이었다. 나는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가. 그리고 누구에게든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친절했고, 어려운 형편에도 불쌍한 사람들에게 적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절대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 더 살지 말자. 내가 산다는 것은 세상을 더 지저분하게 만드는 일이고, 또 누군가를 힘겹게 하는 일이며, 너무 많은 것들에 죄를 짓는 일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나는 아파트 베란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6층에서 떨어지면 머리가 붙어있을까? 수박처럼 두 동강이 나는 일이 생길까? 장이 다 파열하여 저 아래 화단에 핀 샤프란 흰 꽃에 뿌려지면 얼마나 지저분할까?'

     

      죽자고 기를 쓸수록 죽는 일은 힘들었다. 결국 나는 죽지 못했다.

    장로교로, 남묘호령게교로, 절로, 종교가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다녔다. 사직동의 한 교회 목사님은 통일에도 관심이 많고 경제에도 관심이 많으신 데다 나중에 꼭 효도하라고도 하셨다. 어떤 곳에서는 삶에 온 열정을 바쳐 최선을 다하자고 부추겼고, 절에서는 도를 깨치고 선을 행하여 공덕을 쌓는 일이 삶의 목표라고 했다. 시간은 나와 별 관련없이 흘러갔고, 나는 다시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된다는 ‘세상에서는 돈이 가장 훌륭한 종교’라는 진리 아닌 진리를 깨달았다. 더 미친 듯이 일했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부동산을 거머쥐자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동생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님을 기억하라’고 했다. 그때 그냥 ‘널 따라 교회에 가겠다’고 했으면 훨씬 수월했을 것을... 나는 하나님을 예사로 모독했고, 저주하거나 원망했다.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 그가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2010년 11월, 남편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 악함을 그대로 드러나게 해주었던 고마운 그가 세상을 뜬 것이다. 내 힘겨움보다 몇 배로 힘이 들었을 그가 정말 아무말도없이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정말 ‘죽을 만큼 너 때문에 힘이 들었다’고 한마디 하고 감직한데, 단 한마디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죽으려고 그랬는지 그 즈음 말수가 줄면서 내 억지와 잔소리를 다 받아내는 인내를 보여 주었고, 내게 물주전자 하나도 못 들게 하리만큼 나름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지대하게 하던, 그런 그가 느닷없이 죽어버린 것이다.

     

      미움이 너무 큰 때문이었을까. 나는 며칠 동안 10년을 흘리고도 족할 눈물을 쏟아내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나는 얼마나 잘난 인간이어서 그를 그토록 무시하고 그토록 형편없이 대했을 까. 한동안은 ‘이제 내가 벌 받을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무서움증까지 느끼며 집에 있질 못했다. 미안하다고 몇 번을 되뇌고 그를 보냈다.

     

      ‘함께 교회에 가자고 할걸, 마음을 받아주는 일에 인색하지 말걸, 사랑한다고 한번만 애기해 줄걸, 그렇게 창조주 앞에 악다구니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나란 인간은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진단해 주신 말씀인지. 내가 정말 악하고 무익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사실을 너무도 정확히 깨닫게 해주신 말씀이었다. 동생이 내게 했던 말, ‘누나는 참으로 악하다’는 말이 뇌리에 온통 맴돌았다. 내 생각의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것 외에 무엇도 아니라는 동생의 말이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더 이상 버티자고 꼿꼿이 서 있을 일은 아니었다.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차 주저앉히는 이 형편에 다시 머리를 쳐들고 있으면 이제 나는 끝장이 나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처음부터 지는 게임을 게속하자고 용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은 없다.

     

      내가 교회에 다닌 것은 그 두려움 때문만도 아니었다. 삶의 중간에 내가 찾으려고 했던 진리를 만났다는 사실을 교회를 제대로 가면서 알게 된 것이다. 예전처럼 ‘우리 목사님은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고등검찰청쯤에 근무하셨으면 딱 어울릴 텐데 왜 저리 힘겹게 살기를 자처하셨을까? 부목사님은 삼성 본사 기획실쯤에 근무하시면 딱 어울렸을 텐데 앞으로 얼마나 힘겨우실까?’ 이런 생각을 지금은 하지 않는다. 전에 나는 우리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내 생각을 아시면 우리 목사님은 또 날 얼마나 불쌍하게 여기실까마는.

     

      이제 목사님이 두렵다. 동생도 정말 두렵다. 오래 마주보고 있으면 내 속내가 있는 대로 드러날 것만 같으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정말 좋다. 인간적인 모양새를 갖추지 않은 동생의 군더더기 없는 말씀이 듣기가 좋다. 그 말씀이 조용조용하여도 힘있고, 그 말씀에 수식어가 없어도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믿음에 깊이가 없다. 여전히 일요일마다 아이들과 나들이를 가고 싶고, ‘TV나 볼까?’하는 생각도 하고,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잘 졸고, ‘어떻게 하면 돈벌이도 잘할까?’ 하고 여전히 고민하며 산다. 하지만 목사님이 구역예배에 오신다 하면, 그 신령스러운 영을 가진 사람들의 방문에 감사하고,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오는 일요일이면 마음에 차오르는 편안한 기쁨이 있어서 좋다. 감사하게도 아들 딸은 아빠를 잃었지만 엄마와 함께 교회에 군소리 없이 가주었고, 수양회도 참석하여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 주어 고맙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6~11)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제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다. 지금 발 딛고 사는 세상이 사망의 음침한 골짝 같다 하여도 나를 지키시는 분이 계시며, 더 이상 먹고 마시는 준비에 연연하지 않아도 주께서 나를 공중의 새보다 더 잘 먹이실 줄을 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내가 키워냄에 비길까.

     

     

    |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모든 핍박과 힘겨움을 이겨낸 동생 김종필 형제에게 감사한다. 물론 그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마음을 받아 끝까지 누이를 믿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해준 것이 참으로 은혜롭다. 나중에라도 혹 헌금을 도울 일이 있으면 이젠 이전처럼 묻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당연히 주께서 네게 주시는 선물이다’ 할 것이다.

     

      소망이 있다면, 아직 믿음의 길에 서지 못한 올케와 친정아버지가 교회에 나왔으면 하는 것인데, 동생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는다. 나 역시 주께서 나를 아끼고 사랑하신 것처럼 올케와 아버지 역시 구원하실 것을 믿고 있다.

     

      가요보다 더 좋은 <내 영의 노래>가 아침 출근길에 자주 등장한다. 나는 노래를 참 못하는데, 요즘은 내가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어도 정말 좋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남의 외아들

    너는 성령과 권능 받고 땅끝까지 주의 증인되리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내 영의 노래 402장,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참 눈물나도록 은혜로운 곡이지 않은가. 나는 이 찬송만 부르면 자주운다. 감사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징징 운 적이 네댓번은 되었지, 아마.

     

    “여호와에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출처 ; 월간기쁜소식 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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